흔히 인문학을 ‘문사철(문학, 역사, 철학)’이라고 이야기하는데, 그것은 우리에게 삶을 다시 느끼게끔 하는 총체적인 문화 전체를 일컫는다. 분명 우리에게도 문화가 있었고, 문화가 풍요롭게 자리 잡고 있던 시대가 있었고, 공동의 것이면서도 그 속에 무수한 다양성으로 넘쳐나던 문화를 누리고, 이야기하고, 공유하던 시절이 있었다. 그러나 어느덧 그 시절은 사라졌고, 문화라고는 오로지 천박한 유흥 문화, 사람들 간의 우열을 조장하는 명품 문화, 그저 현실을 잊게 하는 쾌락의 대중문화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.
인문학에 대한 요청은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. 사람들이 단순히 ‘문사철’이라는 고상한 교양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, 무언가 잃어버린 마음, 결핍, 결여를 채우고자 인문학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. 사실 교양이라는 것은 그저 그럴듯한 허영을 채워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. 진정한 의미에서 교양은 사람들을 보다 수준 높은 의식으로 묶어주며, 그러한 공동성으로 소통하게 하며, 나아가 서로의 삶을 보다 진정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되어준다.
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얼마나 많은 사상을 아는가, 얼마나 많은 지식을 외우는가가 아니라, 우리의 삶을 인문적으로 다시 생각하고, 해체하고, 통합하고, 반성하는 것이다. 단 한 명의 사상가를 알더라도, 그 사상가를 통해 자기 삶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, 반성하고, 그로써 앞으로의 삶을 다르게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, 그 사람은 진정 제대로 된 인문학을 해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. 우리는 삶을 다시 생각하고, 다시 상상하고, 다시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. 그로써 다시 관계 맺고, 다시 꿈꾸고, 다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.
만약 이와 같은 의미로, 인문학이라는 주제를 가운데 놓고 모이는 이들이 있다면, 그 시도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. 그들은 이미 다른 삶에 대한 자기 내면의 요청을 알고 있기에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. 삶에 대한 공부는 그 내부에 어떤 식으로든 일종의 혁명을 내포하고 있다. 그것은 자신이 지나온 세월에 대한 새로운 되돌아봄의 혁명일 수도 있고, 방황하고 있는 현재에서 한 줄기 길을 발견하는 혁명일 수도 있고, 앞으로 살아갈 삶을 진정 자기의 것으로 바꾸려는 혁명일 수도 있다. 그러한 혁명들이 모이게 되면, 결국 우리가 통탄해마지 않는 이 ‘서로에 대한 적의와 갈등만으로 가득한 사회’ 역시 바뀌어나갈 것이다. 그것은 인문학 책 한 권을 손에 드는 한 사람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.
출처 : 정지우-우리 시대 인문학의 중요성